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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2019 인도 총선을 앞두고 다시 부는 이슬람 유적 파괴의 사이비 역사 정치학

인도ㆍ남아시아 일반 / 인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글로벌인문융합대학 인도학부 교수 2018/03/22

2019 인도 총선을 앞두고 다시 부는 이슬람 유적 파괴의 사이비 역사 정치학

 

인도에서의 힌두민족주의

 

인도에서 민족주의 열풍은 선거철만 되면 분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민족주의가 아니고 ‘힌두’라는 종교의 차원에서 분다. 이른바 힌두 민족주의다. 힌두 민족주의만이 인도의 민족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라는 이론이 나온 것은 1920년대 인도에서 민족주의가 한창 불이 붙었을 때 그들을 분리하여 지배하기 위한 간계로 종교 공동체들을 이간질 시키면서부터였다. 반제 극우 정치 단체인 민족의용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a 라슈뜨리야 스와얌세왁 상가)의 창설자 골왈까르(M.S.Golwalkar)는 힌두란 태고부터 지금까지 인도아대륙에서 살아 온 사람들로서 그 땅의 영원한 주인이고, 그 과정에서 힌두 민족을 형성하는 것은 혈통의 종족뿐만 아니라 정신의 종족이었으니, 이 개념 안에서 그는 무슬림의 경우 전자는 공유하고 있지만 개종함으로써 후자를 상실하여 하나의 민족으로부터 이미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힌두스탄에 살고 있는 비(非)힌두교도들은 반드시 힌두 문화와 언어를 배워 익혀야 하고 힌두 문명의 영광을 찬양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으며 심지어는 공민권조차 제한 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왜곡된 힌두교에 기반한 힌두뜨와(Hindutva. 힌두性)에 의거한 힌두 민족주의 정치 세력은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이후 힌두 찬양을 통한 국가주의 고양 혹은 반(反)이슬람 정서 확산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최대한 꾀할 수 있었다. 그러한 태도는 특히 1980년대부터 본격화 된 종교공동체주의에 의한 정치적 충돌 이후 극대화 되었으니 1992년 12월 6일 자행된 아요디야(Ayodhya)의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 파괴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인도국민당(BJP)는 명실상부한 양대 정당의 하나로 세를 키우고, 급기야 2014년에는 연방 정부를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30년 만에 절대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한 모디 정부는 집권 후 2002년 구자라뜨 학살과 같은 폭력에는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았으나, 요가부 설치, 히말라야-갠지스 인격권 부여, 암소 도축 금지 문제 이슈화 등 힌두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정책을 널리 시행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눈에 띄는 것이 웃따르 쁘라데시 주 수상인 요기 아디띠야나트(Yogi Adityanath)의 타지마할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사이비 역사학자 오끄(P.N.Oak)가 제기한 현재의 타지마할은 원래 쉬바를 모신 사원이었다, 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상당히 뜨거운 감자로 이목을 끌고 있다. 1992년 직전에 인도국민당 정치인들이 아요디야 문제를 끄집어 낼 때와 유사한 분위기다.

 

이슬람 유적 파괴의 전술

 

이슬람의 힌두 사원 파괴의 역사는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침략과 파괴의 역사다. 사원은 항상 재물을 쌓아둔 곳이었고, 여러 가지의 선자본주의적 금융 경제를 행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모든 침략자는 사원을 집중적으로 약탈하였다. 11세기부터 본격화 되던 무슬림의 인도 침략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곳이 구자라뜨(Gujarat) 주에 있는 소마나트(Somanath) 사원이다. 소마나트 사원은 아프간에서 내려온 무함마드 가즈니가 1076년에 처음 약탈 파괴한 이래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무슬림의 힌두 사원 파괴는 일차적으로 재산 갈취 차원이었지만 그들은 우상 파괴라는 관점에서 자신이 행한 약탈을 사실보다 더 크게 떠벌이거나 과장하고 특히 그것을 우상 파괴의 관점에서 기록을 남겼다.

 

단순한 약탈이었던 사건이 무슬림 기록자에 의해 매우 과장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나중에 인도사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데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발단은 식민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시작하였다.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인도의 역사를 고대 힌두와 중세 이슬람으로 설정해 놓았고, 따라서 이슬람 문명의 시작은 뭔가 엄청난 사건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 것이 가즈니의 침략을 그린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그 기록들에 대해서 면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는 차원에서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을 했다.

 

따라서 그 사건은 실제로는 인도 서부에 국한된 한 사원에 대한 약탈 사건이었음에도, 인도 전체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으로 과장되었다. 여기에 반식민주의 차원에서 힌두 민족주의의 역사학도 한 몫을 했다. 고대 힌두 문명을 찬양하기 위하여 무슬림에 의해 파괴된 정도를 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마나트 사원의 복원 문제는 인도가 독립된 직후부터 벌어졌다. 소마나트가 있던 지역은 주나가드(Junagadh) 왕국으로 주민들은 대부분이 힌두였지만 나와브는 무슬림이었다. 나와브는 인도 연방국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파키스탄으로 탈출해버렸다. 인도 연방은 바로 이곳을 접수했고, 동시에 소마나트 사원의 복원을 명령했다. 무슬림 나와브와의 갈등과 이 지역 특유의 간디주의 힌두 민족주의 정서에 내무상 빠뗄이 화답한 것이다. 당시 단순한 한 사원의 복원은 인도의 번영과 연계되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힌두 문화의 찬양과 반(反)무슬림 정서 고양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네루 정부의 주요 기둥인 세속주의 분위기를 해칠 수 있는 분위기 즉 힌두 민족주의의 부상과 종교 공동체 갈등에 대한 두려움이 경계되었다. 1948년 간디 암살과 곧 이어 민족의용단(RSS)의 해산과 활동 금지 명령으로 인해 극우 힌두민족주의에 기반한 정치는 최대한으로 억제되었다. 민족의용단은 1년 만에 정관 개정을 조건으로 정당 해산  조치는 해제되었지만, 1980년대까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인디라 간디가 시크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하여 실정에 대한 비판의 초점을 돌리기 전까지는 종교 공동체 갈등은 현대 인도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힌두 수구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게 된 것은 의용단일가(Sangh Parivar)에 속한 세계힌두회의(VHP)가 아요디야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하자고 주장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요디야는 힌두 세계에서 정치의 이상향이다. 그런데 그곳에 정작 라마 사원은 없고, 이슬람 모스크만 있으니 이를 문제 삼아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하고 라마 사원을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라마탄생지해방전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바브리 사원을 힌두교도에게 개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법원이 주 정부에 개방을 명령하고, 그 판결이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다. 이에 무슬림들은 ‘바브리마스지드행동위원회’를 조직해 법원 판결에 저항했다. 그러면서 아요디야를 둘러싼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무력 충돌의 소용돌이가 전국에 일기 시작했다. 그때 라지브 간디 수상과 연방 정부는 국가 이념이 세속주의임에도 힌두 세력의 이탈을 두려워해 힌두 근본주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라지브 간디는 수구 세력이 아요디야에서 계획하고 있던 주춧돌 안치 의례를 연방 의회와 알라하바드 고등 법원의 판결을 묵살하면서까지 허가해 주었다. 1986년 당 대표로 당선된 노회한 정치인 아드와니는 카슈미르에서 무슬림들이 힌두 사원을 파괴하는 문제를 가지고 더욱 적극적으로 자극하였다 . 인도국민당이 힌두뜨와를 당의 노선으로 천명한 것이다. 그러자 수구 세력들인 민족의용단, 세계힌두회의, 하누만의 당(Banrang Dal)과 같은 연대 단체들이 즉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아드와니는 라트 야뜨라(rath yatra)라는 종교 축제를 정치 퍼포먼스로 바꿔 민심을 자극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여정을 소마나트 사원에서 아요디야로 삼았다. 아드와니는 1990년 9월 25일 라마 신상을 전차에 앉히고 소마나트를 출발해 아요디야로 향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 16일 전국에서 모인 극우 힌두 행동대원은 아요디야 바브리 마스지드를 완전히 파괴해버렸고, 인도 정치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바브리 마스지드 파괴 이후인 1996년의 총선에서는 161석을 차지하여 제1당의 위치에 오르면서 비록 13일간이지만 집권당이 되었고, 1998년에는 182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으로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명실상부한 집권당이 되었다. 그리고 2014년 모디 정부는 30년 만의 절대 과반을 차지하는 단독 정부를 구성하였다.

 

타지마할 쉬바 사원설 논란

 

인도국민당은 2014년 인도 의회 선거 이후 벌어진 여러 중간 선거에서도 큰 패배를 맞은 적이 없다. 2002년 이후 인도국민당은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종교 공동체 갈등을 부추기지 않았다. 그들은 전적으로 회의당의 부패와 자신들의 경제 발전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현재 총선이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인도국민당의 몇몇 정치인이 타지마할이 원래 힌두 쉬바 사원이었다는 이미 지나간 사이비 역사 연구가의 주장을 다시 리바이벌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슈는 아직 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서서히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 이 문제를 끄집어 낸 정치인은 타지마할이 자리하는 웃따르쁘라데시(U.P.)주 주수상과 인도국민당 소속 의원이다.

 

오끄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닌 소위 재야 역사 저술가이다. 그는 힌두교에 함몰된 사이비 역사를 제기한 것으로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모두 힌두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주장의 근거는 그 어휘가 갖고 있는 유사성이다. 기독교(Christianity)는 Chrisn-nity로서 ‘끄리슈나의 길’이라는 뜻이고, 이슬람(Islam)은  Ishalayam ‘신의 자리’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오끄는 바티칸(Vatican)은 산스끄리뜨어 vatika ‘은처’, 아브라함(Abraham)은 Brahma 신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한다. 그가 타지마할이 쉬바 사원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방식이다. 그는 샤자한의 왕비 이름은 따즈가 아니고 뭄따즈라면서 타지마할은 산스끄리뜨어의 teja와 mahalaya가 합해진 어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산스끄리뜨 mahalaya는 위대한 곳 즉 사원이지만 teja는 날카로움, 예리함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왜 이것이 쉬바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오끄는 타지마할에 대한 언급이 샤자한 이후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타지마할에 있는 여러 전통 문양이나 건축 양식에 있어서의 유사점을 들어 이곳이 원래는 샤자한 이전에 힌두 라즈뿌뜨 왕이 세워놓은 쉬바 사원인데 이를 샤자한이 부수고 자기 아내의 묘로 조성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아요디야 바브리 마스지드 파괴와 라마 사원 복원에 대한 의미가 정치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외에도 그는 델리의 랄 낄라(Lal Quila)가 원래 라즈뿌뜨 힌두의 성 랄 꼬뜨(Lal Kot)였고, 러크나우(Luknow)의 이맘바라(Imambara)는 쉬바 사원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귀를 기울일만한 근거는 없다.

 

오끄의 타지마할 쉬바 사원설이 발표된 것은 1989년도였다. 그는 Taj Mahal: The True Story 라는 책을 통해 이 주장을 펼쳤으나 대부분이 거들떠보지 않았다. 심지어는 종교공동체 갈등이 극에 달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모디 정부 들어와 2017년 월에 웃따르 쁘라데시(Uttar Pradesh) 주 정부 수상이 된 요기 아디띠야나트(Yogi Adityanath)의 주 정부가 타지마할을 관광지 목록에서 제외하고, 그곳이 인도 문화를 반영하는 유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어서 인도국민당 소속 웃따르 쁘라데시 주 의원인 상기뜨 솜(Sangeet Som)이 타지마할을 반역자가 세운 건축물로 인도 문화의 오점이다, 라고 2017년 10월에 주장하면서 순식간에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의 주장은 전적으로 오끄의 설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솜은 여기에 정치적 발언까지 보태, 샤자한을 힌두를 학살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등 철저히 종교 공동체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을 하였다. 2017년 11월 17일에는 인도국민당 당원 저술가 발비르 뿐즈(Balbir Punj)는 무케르지(Pranab Mukherji) 대통령이 왜 이슬람 국가 건국 운동의 아버지 격인 사이예드 아흐메드 칸(Syed Ahmed Khan) 경의 탄생 200주년을 축하하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나아가 까르나따까 주정부가 술탄 띠뿌(Sultan Tipu)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띠뿌가 영국에 저항한 것이 애국적이면 영국과 맞서 싸운 히틀러 나치는 왜 악의 세력으로 판단하느냐고 비판했다. 이러한 반(反)무슬림 힌두 근본주의 발흥에 예상대로 학계와 무슬림 정치인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그 가운데 하이드라바드에 지역구를 둔 의원 아사드웃딘 오와이시(Asaduddin Owaisi)는 모디 수상에게 이슬람 건축물인 델리의 랄낄라에 인도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중지할 것인지를 물었고 자신은 유네스코에 문화 유산의 명단에서 타지마할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까지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단 주 지사 요기 아디띠야나트가 나서서 무갈조의 건축물도 모두 인도인 선조의 피와 땀에 의해 세워진 인도의 건축물이라고 진화에 나섰고, 서둘러 아그라 관광 진흥책을 발표하고 타지마할을 방문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문제는 현재로서는 잠복 중이다. 하지만 요기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는 2017-18년 주 예산에서 타지마할 유지 비용을 제외해버리면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화제로 올린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는 상기뜨 솜도 마찬가지다. 솜은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무갈조이지 타지마할은 아니다, 타지마할은 훌륭한 유산이다, 라고 발언해서 원래의 의미를 변색시켰다. 그의 의도는 문화 유산과 이슬람 통치자를 별개로 나누고 그를 통해 종교 공동체 갈등을 기회가 닿으면 다시 꺼내겠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으로 보인다. 오끄는 역사학자라기보다 역사학을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자신이 속한 극우 힌두 정치에 활용하도록 배급하는 역할을 하는 이데올로그로 봐야 한다.

 

역사학이 순수 학문의 길을 택해야 하는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봉사해서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자의 길을 택한 연구자가 학문적 방법론을 부정하고 특정 주장을 퍼트린다면 그는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평가를 받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타지마할 쉬바 사원설 논란

 

타지마할 파괴 문제는 1992년의 바브리 마스지드 파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타지마할이 바브리 마스지드 정도 되는 정치 기념물로서의 파괴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아요디야는 힌두 세계관에서 이상 군주 라마의 고향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종교의 사원이다. 타지마할은 사원이 아니다. 여기에 타지마할이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차지하는 위치도 있다. 더군다나 정부 여당의 입장에서 – 만약 지지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하더라도 - 과연 타지마할에 대한 접근을 과거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해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더군다나 타지마할이 차지하는 인도 연방 정부와 웃따르 쁘라데시 주 정부의 관광 수입이나 그 외 국가 상징으로서의 의미 혹은 도시 개발과의 관련성을 고려해 볼 때 타지마할을 정쟁과 폭력 갈등의 도구로 삼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은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문제는 차기 총선과 관련하여 풀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 점에서 모디 정부는 일찍이 새로운 힌두 근본주의로 방향을 잡아왔다는 점에서 취한 정치 전술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전통적인  힌두 문화를 고양하는 차원에서 요가, 암소, 갠지스 등 매일의 일상에서 힌두 문화를 자금심의 근거로 삼는 분위기로 만들고 그를 통한 정치 문화를 숙성시켜 표로 연결하고자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과거 1992년 직전의 전국 단위의 야뜨라와 같은 행동 대원 동원을 통한 대규모 힌두 문화 축제 같은 것은 예상되지만, 폭력 갈등과 같은 것은 배제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유적과 관련해서는 이슬람 유적의 파괴보다는 고대 힌두-불교 유적의 발굴과 복원, 그것들과 관광 사업의 연계, 고대 민속 문화의 재조명, 고대 신화의 현대화 사업 등으로 연계되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타지마할 파괴 논란은 선거철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극우 정치 선동가에 의해 또 다시 불거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로지 정치적 선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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