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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200년 묵은 앙금, 2018년 1월의 달리뜨(Dalit) 폭동

인도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교수 2018/02/08

2018년 1월 첫 번째 주 마하라쉬뜨라(Maharashtra) 주에서 달리뜨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인도에서 발생하는 ‘집단 간의 충돌(Communal Conflict)’ 중에서는 드물게 200년 전의 사건이 그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도 사회의 뿌리 깊은 장기화된 사회갈등(Protracted Social Conflict)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달리뜨란?

 

달리뜨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불가촉천민의 명칭 중 하나다. 달리뜨는 싼스끄릿어의 달리따(Dalita)의 속어(俗語)로서 ‘분리된, 쪼개진, 강등된, 흐트러진’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에서 기원했다. 위에서 열거한 의미들을 바탕으로 그 사회적 성격을 유추한다면 사회의 일반적이고 주된 흐름에서 벗어난 사람 또는 집단을 가리킨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그 의미가 ‘네 가지의 카스트 즉, 브라만, 끄샤뜨리아, 바이샤, 수드라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주로 마하라쉬뜨라 주에서 사용되었던 달리뜨가 현재에는 불가촉천민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명칭이 되었다.

 

2011년 센서스에 따르면, 현재 인도 내 달리뜨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6.6%인 약 2억 1,000만 명이고 그 카스트 즉, 자띠의 수는 9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달리뜨 카스트들은 서로 간의 전통적인 서열 다툼, 경제적 경쟁 등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세력으로 단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달리뜨를 대표하는 정당인 우따르쁘라데쉬(Uttar Pradesh) 주의 BSP(Bahujan Samaj Party: 국민 다수의 정당)가 주 정부를 장악하기도 했지만 연방 하원에서 의석을 차지한 일은 없었다.

 

200년 전에 무슨 일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마라타 연맹(Maratha Confederacy)사이의 대립이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많이 알려진 동인도회사는 차치하고 마라타 연맹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마라타 연맹은 1674년 힌두의 영웅이자 천재적인 전사(戰士)였었던 시바지(Shivaji)에 의해 창건되었다. 서부 데칸(Deccan) 고원 출신인 시바지는 당시 그곳을 통치하고 있었던 무슬림 군주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왕국을 세웠고, 그 후에는 무갈 제국과 대립을 했다. 그는 외국의 군사적・정치적 영향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힌다비 스와라쟈(Hindavi Swarajya)’ 즉, ‘힌두에 의한 자치’를 내세워 그 당시 인도의 많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무슬림들과의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힌다비 스와라쟈는 20세기 인도 민족주의 운동에도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시바지의 사후에도 마라타 연맹은, 비록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지만, 그 세력을 확장하여 18세기 중반에는 인도아대륙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부인도에서 신흥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동인도회사와의 대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마라타 연맹은 1775년부터 약 40여 년간 동인도회사와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했다. 1818년 1월 1일 현재의 마하라쉬뜨라 주의 꼬레가온(Koregaon)에서 마라타 연맹의 몰락을 결정짓는 전투가 벌어졌다. 마라타 연맹의 페쉬와(Peshwa) 바지 라오 2세(Baji Rao II)는 동인도회사에게 빼앗겼던 뿌네(Pune)를 되찾기 위해 2만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 중이었다. 반면 동인도회사군 834명은 꼬레가온에 저지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동인도회사군 중 영국인을 포함한 유럽인은 24명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 병력 중 500명이 달리뜨인 마하르(Mahar) 카스트 병사들이었고 전투에서 22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하르들이 동인도회사군에 가담한 이유는 페쉬와와 바지 라오 2세가 마하르들을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복무까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페쉬와의 병력 중 전투에 직접 참여한 것은 2,000명의 보병뿐이었지만 동인도회사군의 3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1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페쉬와는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전투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동인도회사군의 대규모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잘못된 정보로 인한 판단착오는 페쉬와를 쫓기는 신세로 전락시켰고, 결국 1818년 6월 그는 동인도회사에 항복했다. 그에 따라 마라타 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반면, 동인도회사는 꼬레가온의 전장(戰場)에 전승비를 세웠고 그것은 현재 그대로 남아 있다. 꼬레가온 전투로부터 꼭 200년이 2018년 1월 1일의 폭동도 이 전승비와 관련이 있다.

 

2018년 1월에는 무슨 일이?

 

꼬레가온의 전승비는 영국인들이 세운 것이지만, 오늘 날 달리뜨들은 이것을 상층 카스트의 억압에 맞서 승리한 자신들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1927년 1월 1일 암베드까(B.R. Ambedkar)의 이 전승비 방문은 꼬레가온 전투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이후 해마다 같은 날 많은 달리뜨가 이곳에 모여 기념식을 열고 있다.  인도 전역에서 수 십만명의 달리뜨가 찾아오는 일종의 성지가 된 것이다. 2018년에도 수 만명의 달리뜨들이 기념식을 열었고, 기념식장 주변에는 이 행사를 반대하는 힌두극우단체들의 집회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 긴장상태가 폭력으로 발전한 원인에 대해서는 시바지의 얼굴이 인쇄된 셔츠를 입은 힌두 청년을 달리뜨들이 폭행・사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힌두극우단체들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도발이 충돌을 불러왔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여하튼 달리뜨와 힌두극우세력 간의 폭행과 투석전이 벌어져 수 십대의 차량이 불탔고 100명 이상의 달리뜨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인도의 대부분의 폭동들이 그렇듯이 이 사건도 마하라쉬뜨라의 다른 지역들로 확산되었다. 1월 2일에는 인도 최대 도시인 뭄바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로 달리뜨들의 시위가 확산되었고 그 다음 날에는 도로와 철도 봉쇄 그리고 버스에 대한 습격이 일어났다. 각급학교와 상점들도 문을 닫아 가장 혼잡한 도시인 뭄바이의 거리가 텅 빈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1월 9일 현재 이번 폭동으로 2명이 사망했으며 30명의 경찰이 부상을 당했고 300여명이 체포되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 폭동이 달리뜨의 인구비율이 높은 우따르 쁘라데쉬(Uttar Pradesh)주나 비하르(Bihar)주로 확산되지 않고 마하라쉬뜨라 주에만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달리뜨들은 왜?

 

한국인의 시각에서 이번 폭동을 관찰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을 가진 한국인으로서는 영국 식민세력에 협력하여 토착왕조를 괴멸시킨 자신들의 선조들에게 자부심을 갖는 달리뜨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내 선조가 동학혁명 때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을 무찔렀다.’고 자랑하는 분위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의 달리뜨들은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었지만 200년 전에는 ‘인도’라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달리뜨를 포함한 절대 다수의 인도인들에게는 카스트와 종교 그리고 지역의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있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없었다. 특히 일반 대중들에게 영국의 침입은 인도 역사상 수십 차례 반복되었던 외세의 등장 중의 하나였을 뿐 자신들의 국민적 정체성을 해치는 침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가 ‘한줌에 불과한 백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도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꼬레가온 전투에서도 동인도회사 병력 중 백인의 비율은 1/40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인도인이었다. 이처럼 영국에 협조 또는 영국의 침략을 방관했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조를 가진 인도인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달리뜨들이 식민세력인 영국인의 전승비를 자신들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받드는 것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달리뜨들이 식민세력의 전승비에서 해마다 기념식을 개최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될 수 있다. 사실 달리뜨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존재한다. 구자라뜨(Gujarat) 주에서 활동하는 달리뜨 지원단체인 나브싸르잔 트러스트(Navsarjan Trust)가 4년간의 현장 조사를 통해 2010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자라뜨 농촌 마을의 90%가 달리뜨의 힌두 사원 출입을 금지했고, 54%의 정부운영학교에서 점심 급식 때 달리뜨는 따로 줄을 서게 했다. 또한, 64%의 촌락위원회에서는 달리뜨의 좌석을 따로 배치했고 별도의 찻잔을 사용하게 하고’ 있었다. 조사가 현재 연방 수상인 모디(N. Modi)가 구자라뜨 주 수상이었던 시절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해야 한다. 즉, 힌두 우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모디가 주 수상 시절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았던 달리뜨 보호에 새로운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는다.

 

전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영국 통치시절부터 달리뜨에 대한 우대정책은 존재했고 1947년 독립한 이후 그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달리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개선되었고 현재 인도 대통령도 역사 상 두 번째의 달리뜨 출신이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달리뜨가 중심이 된 정당이 위력을 떨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리뜨의 불만과 저항의 강도가 높아지는 가장 큰 원인은 달리뜨의 자의식 강화이다. 과거에는 달리뜨와 카스트 힌두 사이의 분쟁은 토지, 임금, 물, 주택 그리고 불가촉천민제의 관습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달리뜨는 자신의 계급을 천형(天刑)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버지가 하던 천한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확산은 달리뜨에게 더 넓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진입을 막으려는 카스트 힌두의 저항도 함께 강화되고 있으므로 두 집단 사이의 분쟁이 빈번해지고 격화되는 것이다. 이번 꼬레가온의 기념식을 방해했던 힌두 극우세력들도, 그들이 내세운 종교적・정치적 슬로건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달리뜨의 사회적・경제적 상승에 대한 불만과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카스트 힌두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독과점하고 있는 파이(Pie)를 지키려 하고 달리뜨 측에서는 그 파이의 일부라도 내어달라고 도전하는 양상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 2018년 1월의 달리뜨 폭동도 이런 갈등의 한 부분이며 이와 유사한 사건들은 앞으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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