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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인도·중국 무력 충돌의 역사적 배경과 전망

인도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2020/08/03

2020년 6월 인도의 라다크 연방직할령(Union territory of Ladakh)의 갈완 강(Galwan River) 계곡에서 인도군과 중국군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비록 중국 측은 자신들의 피해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 충돌에서 인도군 20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하여 지난 수십 년 이래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여러 나라의 언론들은 ‘핵을 보유한 두 대국(大國)사이의 대결’ 등의 자극적인 기사들로 주목을 끌고 있지만, 인·중 국경분쟁의 배경과 역사에 낯선 사람들로서는 이것이 일과성(一過性)의 해프닝인가 아니면 전면전으로까지 확대될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인도와 중국의 분쟁은 크게 나누어 동부와 서부 국경에 집중되어 있고 이번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서부국경 지역이다<그림 1>. 1962년 이래 인도와 중국은 국경문제로 간헐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왔었다. 이와 같은 충돌의 역사와 배 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이 사태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인도와 중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대치상황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이번 사건의 경과와 그 전망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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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이 친?
아마 악사이 친이라는 지명은 대부분의 세계인에게는 음식이름인지 놀이기구의 이름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낯선 단어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악사이 친은 오지 중의 오지이고 역사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그 크기가 3만 7,244㎢이지만 해발 4,300m에서 7,000m에 달해 사람의 거주가 불가능한 곳이다. 단지 여름철에 티베트(Tibet)와 신장(Xinjiang: 新疆)을 오가는 야크(Yak) 통상로만 사용되어 왔을 뿐이다. 악사이 친의 어원에 대해서도 ‘악사이’가 터키(Turkey)계 언어에서 유래한 것임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그 의미는 ‘하얀 돌 사막’또는 ‘하얀 개울’ 또는 ‘동쪽’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친’에 대해서도 그것이 ‘중국’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통로’(Pass)를 의미한다는 새로운 해석이 인도에서 주로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쓸모가 별로 없는 악사이 친이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국경분쟁 중에서 서부국경 문제의 핵심이다. 인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고 접근조차 어렵지만, 중국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즉, 티베트와 신짱을 잇는 유일한 4계절 교통로이자 군사용 보급선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지역은 중국이 실질 지배하고 있어서 행정구역상 신장-위구르 자치구(Xinjiang Uyghur Autonomous Region)와 티베트 자치구에 속해 있다. 물론 인도는 악사이 친 전 지역을 자국 영토로 주장하고 라다크 연방직할령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인도에게 있어서 악사이 친은 수복해야 할 영토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통치력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할 땅인 것이다. 

악사이 친을 둘러싼 두 국가의 분쟁의 배경에는 식민시대의 유산, 인도와 중국의 외교 관계, 정치지도자의 신념과 오판(誤判), 1962년의 전면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네루:‘중국은 내 친구’
네루(J. Nehru, 인도 초대 총리)는 자기 자신의 외교적 자질이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이것이 과대망상이었는지 아니면 외교 천재의 자신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중국 외교정책에 있어서만은 헛발질을 계속했었다. 네루의 대중국정책은 ‘평화지대(Zones of Peace) 전략'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평화지대란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는 냉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가, 영국, 프랑스 등의 과거 식민세력들이 후퇴함으로써 발생한 힘의 공백을 인도와 중국이 메꾸겠다는 구상이 네루의 범아시아주의(Pan-Asianism)였던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인도와 중국이 힘을 합쳐 아시아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루는 중국의 국민당 정권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했었고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이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 정권을 승인하기도 했었다. 네루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국의 존재가 중요했던 것이다.

티베트 합병과 ‘인도와 중국은 형제다!(Hindi-Chini Bhai! Bhai!)'
1951년 5월 중국이 티베트를 공식합병하자 네루에게 중국의 존재는 ‘전략적 구상’이 아니라 ‘외교적 실체’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인도는 중국과 4,000km에 달하는 국경선을 직접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령 인도제국 시대부터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국경 문제는 현안 중의 하나였다. 19세기 중반과 말에 존슨 경계선(Johnson Line), 아르가드-존슨 경계선(Ardagh–Johnson Line), 1914년에 소위 맥마흔 경계선(McMahon Line) 등이 영국에 의해 설정된 일이 있었지만1), 청나라를 포함한 중국 역대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동의한 일이 없었고 또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세력과 체결된 모든 ‘불평등 조약’의 파기를 선언한 일도 있었다. 

네루는 중국과의 분쟁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양보를 거듭했다. 1954년 4월 인도는 중국령 티베트와 인도 사이의 무역·교류협정 체결에 동의하여 사실상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다.2) 같은 해 4월에 네루는 아르가드-존슨 경계선에서 후퇴한 존슨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획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선 이북에 있었던 통신설비를 무상으로 중국 측에 양도하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또 인도와 중국 사이에 그 유명한 ‘평화·공존 5원칙조약(Panchsheel Agreement)’3)이 체결되었지만  티베트라는 거대한 물리적 완충지대를 5원칙 조약이라는 심리적 완충지대와 맞바꾸었다는 비판이 그 당시에도 있었다. 

네루의 호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루의 초청과 권유에 따라 1955년의 반둥(Bandung)회의4)에 저우언라이(Zhou Enlai: 周恩來)가 참석했고 이것은 중국외교의 전환점이었다. 공산화와 한국전쟁 참전으로 국제사회,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중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1957년 3월에는 저우언라이가 인도를 공식 방문한다. 그가 방문한 인도의 모든 도시에서는 거리에 나온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또 열광적으로 외쳤다. ‘힌디 치니 바이 바이!(인도와 중국은 형제다)’ 인도와 중국의 우호관계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였다. 

1950년에서 58년까지 중국과의 우호를 증진하려는 인도의 노력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이 기간 중 인도는 해마다 중국이 유엔의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상정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도 중국의 입장을 변호하였으며 대만(Taiwan)의 중국반환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네루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중국에게 그는 ‘식민세력의 앞잡이’였고 중국의 지도를 받는 인도의 공산세력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중국은 인도와의 관계정상화를 도모하면서도 네루를 포함한 인도의 지도자들을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Bourgeoisie)’로 규정하고 이 계급의 반동적 성격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기본자세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중국에게 인도와의 관계는 ‘세계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1962년 인·중전쟁: 네루의 몰락
인·중관계가 최고조의 우호상태로 향하기 시작했던 1954년 7월부터 중국군은 인도영토를 침범했었다. 즉, 인도군의 실력을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중국군은 서부의 악사이 친, 중부 지역의 바라호띠(Barahoti)5), 동부의 롱주(Longju)6)에서 도발을 하였고, 1959년 인도정부백서에 따르면7), 그 횟수가 34차례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955년 11월 북경주재 인도 대사관이 중국 정부가 악사이 친의 인도영토에 도로를 건설한다는 보고를 했고 1958년이 되어서야 인도 정부는 이 179km 도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나 네루는 이런 사태를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관심은 국토 방어보다는 세계평화에 경도되어 있었으므로 중국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1959년 3월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인도로 망명하자 양국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같은 해 9월 저우언라이는 인도와의 국경 서부지역 즉, 악사이 친의 1만 9,200㎢와 동부지역 즉,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의 4만 8,000㎢를 중국의 영토라고 선언하였고, 더 나가서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국경이 설정된 일은 없으며 영국이 설정한 경계선은 더욱 더 인정한 바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동부와 서부 국경지역에서 양국군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10월에는 총격전으로 인도군 9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포로가 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수많은 외교문서가 교환되었고 네루와 저우언라이 사이의 회담도 이루어졌지만 국경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찾지 못해 국경선에서의 양국군의 충돌은 빈도와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드디어 1962년 10월 20일 중국은 선전 포고없이 인도를 침공했다. 동부, 중부, 서부 세 방면에서 동시에 시작된 중국군의 공격에 인도군은 어이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개전 4일 만인 24일 인도군은 동・서 국경의 주요 전략적 거점을 모두 상실하였다. 꼭 1개월 간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인도는 그 외교적・군사적 무능을 세계에 보여 주었다. 

네루는 중국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악사이 친에서 전진정책(Forward Policy)을 추진하였고 중국이 인도를 침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8) 네루는 중국이 침공 준비에 한창이었던 1962년 9월에서 10월 중순까지 외국을 순방하였고 국방장관 역시 9월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즉, 어느 누구도 인도의 영토를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9) 이 1962년 전쟁의 결과로서 인도는 비동맹세계 내에서 지도력을 상실했고 외교정책에서도 선택의 폭을 축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국경선 문제에 있어서도 인도는 악사이 친을 상 실하고 중국이 주장한 실질 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10)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아시아 지배를 최대의 목표로 삼았었던 네루는 실의에 빠진 채 1964년 사망했다.

2020년 6월 갈완 계곡 사건
당연한 일이지만, 1962년 전쟁이후 인도의 외교정책에는 큰 변화가 왔다. 미국과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중점을 두었고 중국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비동맹 원칙도 포기할 정도의 적대정책을 유지했었다. 두 국가의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 부터였다. 그러나 악사이 친을 비롯한 실질 통제선에서는 양국간의 간헐적인 충돌이 지속되어 왔었다. 1975년에는 동부지역에서 인도군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었고 2013~2015년 3년간에는 해마다 양국 간의 대치가 악사이 친에서 벌어졌다. 2017년에는 부탄(Bhutan) 영토인 도크람(Doklam)에서 양국이 국지전 직전까지 간 상황이 약 2개월 간 지속된 일이 있었다. 이번 갈완 사건도 이 일련의 사건들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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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완 계곡은 악사이 친의 남부를 흐르는 갈완 강(江)11) 유역을 가리키며 인도측 실질 통제선의 북단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그림 2> 참고) 하지만 서로의 통제지역을 가름하는 경계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척 애매하고 불안정한, 소위 순찰경계선(Patrol Line)이라는 가상의 선을 양측이 잠정적으로 기준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군인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고, 특히 인도군의 경우 수일에 한번 정도 순찰하거나 전자 장비를 이용하여 감시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상대편이 천막이나 임시막사를 설치해도 즉시 대처하기 어렵다. 중국군은 이 허점을 이용하여 자주 인도군을 도발해왔었다. 2020년 6월 15일 사건도 중국군이 인도영토에 설치한 천막을 철거하려는 100여 명의 인도군과 그것을 거부하는 숫자 미상의 중국군 사이의 충돌이었다. 양국군은 기존의 합의에 의해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먹과 돌, 몽둥이 등을 이용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인도군 20명 사망과 70명의 부상자 그리고 10명이 포로12) 가 되었고, 중국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사망 0명에서 40명 이상까지 다양한 추측만 나오고 있다.13) 인도군 입장에서 본다면  악사이 친 지역에서 1962년 이래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냉정하게 이야기 한다면 인도군의 사상자는 모두 전술적 미숙함과 안이함에서 발생한 것이다. 첫째, 일몰이 빠르고 기후변화가 무상한 고산지대에서 오후 4시 30분에 중국군 천막에 도착했다는 것 자체가 미숙했다. 둘째, 중국군의 반격에 대비한 퇴로 확보, 조명장비 등의 준비가 없었다. 셋째,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갈완 계곡의 지형조차 잘 모르는 지휘관을 파견했다는 점이다. 사망자 20명 중 17명이 계곡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사실이 인도군의 안이함을 잘 보여 준다. 인도 언론에서는 쇠못이 박힌 몽둥이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1개 중대가 전멸에 버금가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설명으로는 불충분하다. 

분노한 인도(?)
양국군은 7월 5일 충돌지점에서 각각 1.8km 후방으로 병력을 철수하기로 합의하여 사태를 일단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양국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인도 국민들의 분노는 문자 그대로 ‘폭발’했고, 중국은 상대적으로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인도 정부는 라다크에 병력 증원, 러시아제 전투기의 도입을 발표했고, 시민들의 중국제품 불매운동과 반중시위가 벌어졌으며 더 나가서 틱톡(TikTok)과 위챗(WeChat)을 비롯한 59개 중국제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자국 군인 20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당연한 분노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와 같은 격렬한 반응이 군사적 또는 경제적으로 두 국가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먼저 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번 사건이 더 큰 국지전 또는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이유는 군사력의 불균형이다. 인도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로 710억불의 국방비를 쓰는 국가이다. 그러나 액수로 따진다면 미국 7,320억불, 중국 2,610억불에 비하면 각각 약 1/10, 1/4에 불과하다.14) 더군다나 인도군의 비효율성, 장비부족 그리고 조달업무의 부패가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번 사건의 사망자 20명 중 17명이 중국군의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라 절벽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보도를 보면 이 인도군들은 글자 그대로 공포에 질려 후퇴하다가 추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병사들의 사기의 측면에서도 인도군은 1962년 참패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인도가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요즘, 인도에서는 중국산 TV와 휴대폰을 때려 부수는 장면을 볼 수 있고 ‘#BoycottChina’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있다. 2019년 인도는 중국과의 교역에서 490억불의 적자를 보았다.15) 바꾸어 말한다면, 인도의 대 중국 수입은 총 수입의 13.7%인 반면, 수출은 5.1%에 불과했다. 인도 전자제품 시장의 50%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으며, 항생제 원료의 경우에는 76.3%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의 스타트업(Start up) 기업의 절대 다수가 중국 자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상 모디(N. Modi) 인도 수상은 집권 초기부터 ‘Make in India’를 경제정책의 대표적인 구호로 삼아왔지만 그 성과는 극히 미미하였다. 또 지난 1개월 간 수입이나 투자유치 대상국을 한국, 일본 등으로 바꾸자는 제안들이 나왔지만 이것은 쉽게 성과를 낼 정도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경제 보이코트는 불가능하고, 이것을 억지로 실행한다면 ‘중국보다는 인도에 더 큰 해를 끼칠 것’16) 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군사적 또는 경제적 보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현 인도 정부 즉, 모디 수상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국민들의 반중국 정서는 고조되고 있고 모디 수상의 정치적 기반인 소규모 자영농과 판매상들이 경제개방 확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 정부의 선택의 폭은 더욱 줄어든다. 인도는,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중국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양국 관계를 사건 이전의 현상(status quo)으로 되돌리고 앞날을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분노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겠지만, 그것에 대한 평가는 현 정부가 얼마나 진지하게 탈(脫)중국 정책을 시행하는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인도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다.      

인도는 중국이라는 무척 탐욕스럽고 교활한 이웃을 두고 있다. 이 갈완 사건과 같은 유형의 충돌은 과거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인도가 처하게 된 데에는 네루의 책임이 크다. 네루는 선의와 양보로서 중국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처절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어느 영화의 대사이지만 “선의를 계속 베풀면 상대는 그것을 권리로 생각한다.”는 말이 인도와 중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각주
1) 존슨 경계선은 1865년 설정된 영국의 경계선. 아르가드-존슨 경계선보다 범위가 좁다. 즉, 악사이 친 지역 이북의 곤륜산맥 부근은 포함되지 않는다. 아르가드-존슨 경계선은 악사이 친은 물론 포함하여 야르칸드(Yarkand)강까지 경계선을 확장한다는 것이었다. 맥마흔 경계선은 현재의 부탄(Bhutan)왕국에서 동북인도에 이르는 약 1,150km의 국경선을 영국과 티베르가 획정한 것이다. 1914년 당시 중국은 이 협의에 참가는 하였으나 협정문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2) 이 협정으로 인도와 중국의 순례자들이 양국의 영토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티베트 지역을 통한 무역이 활발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는 양국의 교역 및 통행은 ‘십끼 라 고개(Shipki La Pass)’, ‘니띠 고개(Niti Pass)’, ‘마나 고개(Mana Pass)’ 등으로 한정되었는데 이 고개들이 어느 쪽의 관할에 속하는지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뒷날 분쟁의 한 원인이 된다. 
3) 이 조약은 다음 다섯가지의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① 상호 영토와 주권에 대한 존중, ② 상호 불가침, ③ 내정 불간섭, ④ 평등과 상호 이익, ⑤ 평화공존 
4) 반둥회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국들이 반식민주의와 상호간의 협력과 친선의 확대 그리고 냉전체제의 그늘에서 신생국들이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모색을 위하여 개최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논의되었던 것들 중 상당 부분이 후에 비동맹운동의 모체가 되었고 제 3세계라는 새로운 정치적 실체의 모체가 되기도 했었다.
5) 중북부 우따르 프라데쉬(Uttar Pradesh)주의 한 작은 마을
6) 인도 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의 마을
7) Goverment of India. 1959. White Paper. New Delhi: Publications Division. 391
8) 네루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던 1962년 9월 ‘나는 중국이 우리에게 강력한 수단을 쓰지 않으리라는 충분한 이유를 알고 있다.’고 발언했다.(B. M. Kaul. 1967. 365)
9) Appadorai, A & Rajan, M. S. 1988. 145 
10) 실질 통제선은 인도와 중국사이의 매우 영토분쟁지역에 엉성하게 설정된 분계선을 의미한다. 1959년 저우언라이가 네루에게 최초로 제안한 것으로서 1962년 전쟁 직후에는 악사이 친에만 적용되었으나 현재에는 동부의 분쟁지역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된다.
11) 갈완 강의 길이 약 80km이며 해발 3,000m 이상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12) 이 포로들은 6월 18일 송환되었다.
13) New York Times. 2020. 6. 16. Worst Clash in Decades on Disputed India-China Border Kills 20 Indian Troops.
14) The Economic Times. 2020.4.27. India third largest military spender in world, after US  and China. 
15) The Hindu. 2020.7.2. India’s trade deficit with China dips to $48.66 billion in FY20. 
16) Foreign Policy. 2010. 6.29. Why a Trade War With China Is a Bad Idea for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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